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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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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낙랑공주는 고려 태조와 신명순성왕후의 딸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과 혼인하였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입조하자 태조는 낙랑공주와 경순왕의 혼례를 거행했다. 헌숙왕후의 어머니이며, 경순왕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경순왕 후손들의 특권을 위해 족보 위조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낙랑공주의 자녀에 대한 기록도 문헌마다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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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공주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고려의 공주
별칭안정숙의공주 (安貞淑儀公主)
신란궁부인 (神鸞宮夫人)
생애
출생897년, 개성, 고려
사망미상, 개성, 고려
묻힌 곳미상
가족
아버지태조
어머니신명순성왕후 유씨
배우자경순왕
자녀미상
가문
출신 가문개성 왕
혼인 가문경주 김
왕녀로서의 정보
왕조고려
통치자왕건, 태조
유형군주
전임'왕조 설립 (본인이 고려 최초의 공주)'
후임흥방궁주
왕비로서의 정보
왕조신라
재위미상
유형재위 기간
배우자경순왕 (912년 결혼)
후임왕녀 왕건과 그의 다른 부인인 성무부인의 딸 (이복 여동생)
칭호
시호효목 (孝穆)
존호안정숙의공주 (安貞淑儀公主)
기타 정보
신란궁부인신란 (神鸞)

2. 생애

낙랑공주는 태조와 신명순성태후 유씨(劉氏)의 딸로, 신라경순왕과 혼인하였다.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으로도 일컬어진다.[1]

935년 11월 22일, 태조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입조(入朝)하자 정전(正殿)에 나와 백관을 모아놓고 예를 갖추어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혼인을 거행하였다.[1]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아버지태조877년943년
어머니신명순성왕후 유씨??
배우자경순왕896년978년
헌숙왕후 김씨[3]937년?
경주 김씨 부인913년?
아들김석 의성군922년?
아들김은열 대안군934년1028년
경주 김씨 부인936년?
아들김건 강릉군940년?
아들김선 언양군943년?
아들김추 삼척군946년?
김려경950년?


4. 경순왕 자녀 논란과 문헌 왜곡

고려조선 시대에 경순왕 후손들에게는 군역과 부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다. 이 때문에 이를 기회로 삼아 족보를 위조하여 경순왕의 후손인 척하며 특전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심해졌다. 1930년년대에 각 씨족들이 족보를 발간하면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이 시호나 군호를 붙이거나, 시조를 경순왕대까지 끌어 올리는 등 족보 위조 및 변조가 극에 달했다.[4][5]

이후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신라경순왕전비문》을 다시 왜곡하여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를 '황'(湟)이라 하며, 셋째 왕자가 명종(鳴鍾)이며 영분공(永芬公) 시호를 받았다고 하는 등 내용을 고쳤다. 그러나 정작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는 둘째 아들 황(湟)과 넷째 아들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해 주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김은열 묘지명》등은 정사(正史)에 뒷받침 되지 않은 내용으로 조선 후기 족보 편찬 과정에 위조(僞造)된 지석(誌石)을 바탕으로 가탁(假託) 내지 조작(造作)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순왕의 자녀들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문헌별, 시대별로 차이를 보인다.

문헌내용
《김은열 묘지명》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8명의 아들을 두었다: (鎰), (鍠), (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鍵), (鐥), (鐘)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2자 (鍠)을 (湟)으로, 3자 (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신라경순왕전비문》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누락, 제5자 중석(重錫)을 (錫)으로, 제8자 (鐘)을 (錘)로 개명, 2녀를 추가
《김씨 분관록》《김은열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8자들은 모두 배척,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후비 왕씨 소생 중 석(錫), 선(鐥), 추(錘) 3명에 대해서만 군호를 붙여 의성군 석(錫), 언양군 선(鐥), 삼척군 추(錘)라 하며 시조로 기록
경주 김씨 일문《신라경순왕전비문》을 재차 왜곡하여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태자의 이름을 (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를 (湟)이라 하며, 셋째 왕자가 명종(鳴鍾)이며 영분공(永芬公) 시호를 받았다고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각 문헌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아들들을 각 파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들 순서이름
1자김일(金鎰)부령(부안) 김씨, 통천 김씨, 경주 김씨 태자파 시조[10]
2자김굉(金鍠, 김황(金湟)으로 개명)나주 김씨 비조[11][12]
3자김명(金鳴, 김명종(金鳴鍾)으로 개명)경주 김씨 영분공파 파조[13]
4자김은열(金殷說)경주 김씨 은열공파 파조[14]
5자김중석(金重錫, 김석(金錫)으로 개명)의성 김씨 시조[15]
6자김건(金鍵)(후)강릉 김씨 시조[16]
7자김선(金鐥)언양 김씨 시조[17]
8자김종(金鐘, 김추(金錘)로 개명)삼척 김씨, 선산 김씨 김추 계 시조[18]



경순왕의 딸은 다음 두 명이 기록되어 있다.

4. 1. 《김은열 묘지명》과 그 진위 여부

1784년(정조 8)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작성한 《김은열 묘지명》에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후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4][5]

이후 1785년 김사목(金思穆)은 경주 김씨 족보를 수정하면서 추가로 작성한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에서 둘째 아들 '굉'(鍠)을 '황'(湟)으로, 셋째 아들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이름을 고치고, 넷째 아들 은열(殷說)에게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는 시호를 붙이는 등 내용을 많이 추가하였다.[4][5]

《김은열 묘지명》은 배우자 및 생애 등이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의 순서만 기술되어 있어 완전하지 않다. 또한 《묘지명》에 나오는 아들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어떤 금석문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명》은 나라의 역사 기록들과 다르기 때문에 의문을 갖게 한다.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는 둘째 아들 '김굉'(金鍠)과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이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왕씨(王氏) 소생이며,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둘째 아들이 낙랑공주 소생이라는 설은 근거 없는 허설이다.)

4. 2. 《신라경순왕전비》

1814년(순조 14) 강릉인 김계락(金啓洛)이 쓰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비석 《신라경순왕전비》에는 경순왕전비 박씨와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차자(次子)·영분공자(永芬公子)이고, 딸은 고려 경종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또 후비 왕씨와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2자 황(湟)·3자 명종(鳴鍾)은 싣지 않고,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고쳐서 『은열(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 5형제를 두었으며, 2녀는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각각 시집갔다고 한다.[6]

4. 3. 문헌 왜곡의 심각성

고려조선 시대에 경순왕 후손들에게는 군역과 부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다. 이 때문에 이를 기회로 삼아 족보를 위조하여 경순왕의 후손인 척하며 특전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심해졌다. 1930년년대에는 각 씨족들이 족보를 발간하면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이 시호나 군호를 붙이거나, 시조를 경순왕대까지 끌어 올리는 등 족보 위조 및 변조가 극에 달했다.[4][5]

1784년(정조 8)에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작성한 《김은열 묘지명》에 따르면,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한 후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이름은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한다. 이후 1785년 김사목경주 김씨 족보를 보완하면서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에 2째 아들 '굉'(鍠)을 '황'(湟)으로, 3째 아들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이름을 바꾸고, 4째 아들 은열(殷說)에게는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는 시호를 붙이는 등 내용을 많이 수정하였다.

《김은열 묘지명》은 배위(配位)와 생애 등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형제의 순서만 기술되어 있어 완전하지 않다. 또한 《묘지명》에 나오는 아들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어떤 금석문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는 2째 아들 '김굉'(金鍠)과 4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녀인 낙랑공주 왕씨에게서 태어났으며, 고려에서 평장사 벼슬을 지냈고, 나라에 공을 세워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받았다고 한다.

1814년(순조 14) 강릉인 김계락(金啓洛)이 쓰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비석 《신라경순왕전비》에 따르면, 경순왕전비 박씨와의 사이에서 3남 1녀 (태자, 차자, 영분공자, 고려 경종에게 시집간 딸)를 두었고, 후비 왕씨와의 사이에서는 5남 2녀 (경주 이씨 이금서, 장수 황씨 황경에게 시집감)를 두었다고 한다.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첫째 아들 일(鎰), 둘째 아들 황(湟), 셋째 아들 명종(鳴鍾)은 제외하고, 다섯째 아들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여덟째 아들 '종'(鐘)을 '추'(錘)로 바꾸어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 5명의 아들을 기록했다.[6]

현재 《김은열 묘지명》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의 시호가 '영분공'(永芬公)이라고 하며, 경주 김씨 영분공파에서는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정작 ‘경주 김씨 영분공파’ 족보에는 영분공의 이름이 없다.[7][8][9]

5. 대중문화 속 낙랑공주

참조

[1] 문서 Half little sister, daughter of Taejo of Goryeo, her father and Lady Seongmu, his other wives.
[2] 문서 외조부는 충주 지방의 호족으로 태사 내사령(太師 內史令)에 추증된 유긍달(劉兢達)이다.
[3] 서적 고려사
[4] 간행물 월간조선 2015년 2월호 504페이지
[5] 웹사이트 인제문화원 '마의태자 유적지비' http://www.injecultu[...]
[6] 웹사이트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http://gsm.nricp.go.[...]
[7] 웹사이트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http://gsm.nricp.go.[...]
[8] 서적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9] 서적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
[10] 문서 작금에 와서 부안 김씨· 통천 김씨· 경주 김씨 태자파에서 시조로 소원시키고, 1자 '김일'과 마의태자가 동일인이라 주장하며 서로 자신들의 시조라 한다. 그러나 사서(史書)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도 별도 인물이라 기록하고 있다.
[11] 문서 역사에 시조 김운발은 경순왕의 손자라 전하는데, 작금에 와서 일부 나주 김씨에서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가 '김황'이라 한다. 또 경순왕 계자(季子. 막내아들)인 범공 스님과 동일인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경순왕 2자 김굉(또는 김황)과 4자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고려 평장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도 하사(下賜)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서(史書) 및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에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12] 문서 계자(季子)란 막내아들을 의미하는데, 죽방부인 소생이라는 제2자 김굉(또는 김황)과 제3자 김명(金鳴)[또는 김명종(金鳴鍾)의 서차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여기서 경순왕시절에 막내왕자로 季子로 표기했을 것임)
[13] 문서 작금에 와서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김명종'의 시호가 '김영분'(金永芬)이며, 경순왕과 죽방부인 사이의 셋째 왕자라 한다. 경주 김씨 영분공파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서(史書)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14] 문서 일설에 경순왕 제3자라 한다.
[15] 문서 일설에 경순왕 제4자라 한다.
[16] 문서 작금에 와서 강릉 김씨 시조라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17] 문서 일설에 제6자(第六子)라 한다.
[18] 문서 작금에 와서 삼척 김씨와 선산 김씨에서는 서로 자신들의 시조라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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